현대사회를 향한 불교의 생태적 응답

chorok

2019-08-25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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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를 향한 불교의 생태적 응답
- 지율
주제가 ‘현대사회를 향한 불교의 생태적 응답’인데 사실 제가 현대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불교의 생태관에 따라 활동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이것은 제가 살고 싶은 세계가 아니다’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불교적인 관점으로 보일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오래된 이야기지만 제가 처음 환경문제를 시작한 이야기를 먼저 드려보려 합니다.
한국에서 스님들은 대부분 공동생활을 통해 수행을 익힙니다. 30~40명이 한방을 쓰며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고 같이 먹고 앉고 같이 걸으며 공부를 합니다. 규율은 비교적 엄격해서 묵언을 하고 자신의 소임 외에는 관여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보통은 3개월을 주기로 해제와 결제를 하며 이 기간에는 많은 것을 통제 받지만 수행은 철저하게 개인적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모든 스님이 그러한 규율 속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5분의 1정도의 스님들은 외부 일에 관여하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고, 5분의 4정도의 스님들은 포교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절을 운영하는 소임을 살게 됩니다. 스님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공부를 하거나 주지를 살거나 사회활동을 해도 계율에 근본하면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통제 시스템이 느슨한 편입니다. 아무튼 사회로 나오기 전에 저는 선방이라고 하는 전자의 세계 속에 있었습니다.
규율이 엄격하지만 열흘에 한번 삭발을 하는 날이 있습니다. 삭발날은 입선을 드리지 않고 자유롭게 산책도 바느질도 하고 차도 마시며 개인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삭발날이면 산을 좋아하는 저는 산에 갑니다. 선원이 산속에 있기에 산행을 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날도 평소처럼, 산길을 혼자서 걸어 올라갔습니다. 푸른 잎들이 뾰쪽이 내미는 화창한 봄날이었고, 햇살이 나무 사이를 층층이 비껴들어오는 숲길을 걸으며 수행과 공동생활의 긴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상 가까운 곳에 다다랐을 때, 포크레인이 바위를 깨부수고 있는 현장과 부딪혔습니다. 당황하고 화가 나긴 했지만 제가 처음부터 현장을 보고 멈춰 선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 근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늘 보아온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공사현장을 보자 더 이상 산을 갈 마음이 나지 않아 가던 길을 되돌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길을 뛰다시피해서 내려왔습니다. 등 뒤에서 계속 포크레인이 바위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찰에 돌아와 여느 때처럼 좌선을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제 귀에 바위가 깨지는 소리 밖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밖에 나와 먼 산을 바라보면 이상하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며칠 동안 혼자 고민을 하다가 대중스님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스님들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일회용 카메라도 준비했습니다. 그 후 바위를 깨고 산을 깎는 공사가 산을 관광화하기 위해 도로를 만들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관광도로 외에 산의 중앙을 가르고 들어오는 16km 터널도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산정상부와 산 중앙부를 가르고 가는 도로와 터널이 산과 산에 사는 생물들에, 산속에 있는 아름다운 작은 늪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되었고 그것은 10개의 법적 보존지역으로 지정된 천성산의 가치를 크게 훼손하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 현장을 본 이후로 수행처를 벗어나 거리로 나왔고, 격랑 속에 섰으며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했습니다. 스승에게 예경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은 평온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산문을 떠난 길은 자신이 안주하고 있던 세계의 벽에 부딪히는 일이었고 그동안 쌓았던 수행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 공사 현장을 목격하기 전까지 저는 컴프터는 물론 핸드폰도 만져 본 일이 없었습니다. 사회문제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투표장에 가거나 사회활동에 참여한 일도 없습니다.
처음 일을 하면서도 제 생각은 단순해서, ‘ 산이 아파서 나를 불러 쓰고 싶어하는 구나‘ 하고 생각했고, ’게으르고 세상의 아픔에 무관심하게 산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사유에 의해 활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드리고 싶습니다.
일을 하면서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생명이 어떤 위험에 처해있는지, 우리가 자연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무심하게 진행하고 있는 일들이 어떤 과정과 결과로 돌아오는지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소비하면서 비대해지는 기업과 경제발전을 중요한 지향점으로 삼고 있는 자본주의의 측면에서 보면 환경과 생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대단히 큰 걸림돌이었고, 저는 개발이나 발전을 저해하는 암과 같은 존재로 지목되었습니다.
제가 ‘산이 울고 있다’고 하자 사람들은 저를 ‘만신’이라고 조롱했습니다. 천성산 생태계의 지표종인 도롱뇽을 원고로 소송하자 기업이 지원하고 있는 연구소들은 천성산 공사 터널 공사가 지연되면 연간 2조 5천억 원의 손실이 난다는 보고서들을 내놓았습니다. 국내 보수 언론 역시 ‘도롱뇽을 살리기 위해 수조원의 국고가 낭비되고 있다며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손실문제를 이야기하자 사람들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은 곧바로 은유를 버렸지만 아이들은 은유를 잘 이해하고 엽서를 써서 소송이 진행중인 법원에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제 운동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단식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천성산 공사 백지화는 취임하는 대통령의 공약사업이었고 도지사, 시장의 공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린다.’는 식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도 그것을 관행으로 받아들였지만 저는 그 관행을 수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는 제가 소중히 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저항했습니다. 단식, 3000배, 3보 1배, 국토순례, 거리 사진전, 어느 때는 공사 현장에서 공사장 사람들과 문자 그대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웠습니다.
일을 하면서 저는 제가 무엇을 피해서 살아왔는지, 세상과 어떻게 소통했는지 신앙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싸워야 하는 힘들이 무엇인지, 저를 지지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 눈에서 무엇이 담겨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국내주요 언론은 연일 기사와 사설을 통해 비난을 퍼부었고 안티카페가 5개나 생겼으며 제 기사에는 조직적인 댓글 팀이 동원되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비난보다 제가 지키려고 하는 것들을 잃게 되는 것을 더 상심했습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저를 이끌어 준 힘은 우정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뿐 만아니라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우정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제가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불가에서는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 형상이 있거나 형상이 없는 모든 것을 화엄이라고 합니다. 바람소리 물소리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 엄마가 아이를 부르는 소리 풍경소리 모두가 세상을 장엄하는 실상이며 이를 화엄이라고 합니다.
빛과 소리를 사랑하고 이해하면 말과 꿈이 맑아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순화된 언어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에게 저항 할 수 있는 수단이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도롱뇽과 함께 꿈꾸는 초록빛 세상에는 사랑, 평화 그리고 생명의 숨소리가 있다.’
‘도롱뇽에게는 하늘 마음이 있고, 희망의 지도가 있다.’ ‘초록의 공명’ 등 평범한 생각들을 거리에 앉아 수놓았습니다. 바느질은 제가 즐겨하던 일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수놓기에 동참해주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수녀님들께서도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때 거리에 앉아 함께 수놓던 인연이 오늘 이 자리까지 온 게기가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한국에서 불교와 가톨릭의 우정이 시작된 시점이라는 이야기도 드리고 싶습니다.

종교 간의 화합은 같은 지향점을 바라볼 때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향한 연민,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 가난과 빈곤으로 고통 받고 정치적으로 박해 받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만나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우정, 종교 간의 우정은 세상을 순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물론 그동안 노력에 비해서 얻은 것은 아주 적은 것들입니다. 어쩌면 세상은 더 악화되고 있고 가망이 없어 보일 때가 많습니다. 현대 사회는 새롭고 복잡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는 물론 저 우주너머 까지 지식을 더 해갑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그것은 단지 지식의 한조각일 뿐입니다. 무한한 공간, 무한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아침 이슬 같은 존재 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직접적인 행복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이상 빼앗지 않고 나누는 삶을 살게 될까요? 저는 질문자로서 그리고 좋은 답을 찾는 사람으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환경문제 외에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농업문제이며 자연의 순리에 적응하며 적게 가지고 만족 삶의 방식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댐으로 인해 수몰될 지역에서 텐트를 치고 살면서 사람들이 떠나고 폐허가 된 마을에 남아 농사를 지으시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큐로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호미를 놓지 않으셨던 할머니들의 삶은 교훈으로 가득했습니다.
<영상>
이제 할머니들은 그곳에 남아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그곳에 머물고 있으며 강과 그곳에 깃드는 모든 생명들이 존중 받을 수 있도록, 자연은 재화 이상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강의 숨결 느끼기’, ‘강의 땅을 강으로’, ‘댐보다 습지를!’ 이라는 구호 속에서 한 평사기 운동을 진행하고 4대강 기록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영주댐 철거 소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문명이 가는 아주 빠른 걸음 위에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그러나 제 모든 성의를 다해 일을 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방문자로 이 세상에 왔다는 것, 언젠가 이 땅을 떠나게 되는 날이 오면 세상의 빛과 조우했던 시간, 세상의 아픔에 함께 했던 우정의 손길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지율
주제가 ‘현대사회를 향한 불교의 생태적 응답’인데 사실 제가 현대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불교의 생태관에 따라 활동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이것은 제가 살고 싶은 세계가 아니다’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불교적인 관점으로 보일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오래된 이야기지만 제가 처음 환경문제를 시작한 이야기를 먼저 드려보려 합니다.
한국에서 스님들은 대부분 공동생활을 통해 수행을 익힙니다. 30~40명이 한방을 쓰며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고 같이 먹고 앉고 같이 걸으며 공부를 합니다. 규율은 비교적 엄격해서 묵언을 하고 자신의 소임 외에는 관여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보통은 3개월을 주기로 해제와 결제를 하며 이 기간에는 많은 것을 통제 받지만 수행은 철저하게 개인적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모든 스님이 그러한 규율 속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5분의 1정도의 스님들은 외부 일에 관여하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고, 5분의 4정도의 스님들은 포교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절을 운영하는 소임을 살게 됩니다. 스님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공부를 하거나 주지를 살거나 사회활동을 해도 계율에 근본하면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통제 시스템이 느슨한 편입니다. 아무튼 사회로 나오기 전에 저는 선방이라고 하는 전자의 세계 속에 있었습니다.
규율이 엄격하지만 열흘에 한번 삭발을 하는 날이 있습니다. 삭발날은 입선을 드리지 않고 자유롭게 산책도 바느질도 하고 차도 마시며 개인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삭발날이면 산을 좋아하는 저는 산에 갑니다. 선원이 산속에 있기에 산행을 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날도 평소처럼, 산길을 혼자서 걸어 올라갔습니다. 푸른 잎들이 뾰쪽이 내미는 화창한 봄날이었고, 햇살이 나무 사이를 층층이 비껴들어오는 숲길을 걸으며 수행과 공동생활의 긴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상 가까운 곳에 다다랐을 때, 포크레인이 바위를 깨부수고 있는 현장과 부딪혔습니다. 당황하고 화가 나긴 했지만 제가 처음부터 현장을 보고 멈춰 선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 근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늘 보아온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공사현장을 보자 더 이상 산을 갈 마음이 나지 않아 가던 길을 되돌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길을 뛰다시피해서 내려왔습니다. 등 뒤에서 계속 포크레인이 바위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찰에 돌아와 여느 때처럼 좌선을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제 귀에 바위가 깨지는 소리 밖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밖에 나와 먼 산을 바라보면 이상하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며칠 동안 혼자 고민을 하다가 대중스님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스님들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일회용 카메라도 준비했습니다. 그 후 바위를 깨고 산을 깎는 공사가 산을 관광화하기 위해 도로를 만들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관광도로 외에 산의 중앙을 가르고 들어오는 16km 터널도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산정상부와 산 중앙부를 가르고 가는 도로와 터널이 산과 산에 사는 생물들에, 산속에 있는 아름다운 작은 늪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되었고 그것은 10개의 법적 보존지역으로 지정된 천성산의 가치를 크게 훼손하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 현장을 본 이후로 수행처를 벗어나 거리로 나왔고, 격랑 속에 섰으며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했습니다. 스승에게 예경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은 평온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산문을 떠난 길은 자신이 안주하고 있던 세계의 벽에 부딪히는 일이었고 그동안 쌓았던 수행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 공사 현장을 목격하기 전까지 저는 컴프터는 물론 핸드폰도 만져 본 일이 없었습니다. 사회문제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투표장에 가거나 사회활동에 참여한 일도 없습니다.
처음 일을 하면서도 제 생각은 단순해서, ‘ 산이 아파서 나를 불러 쓰고 싶어하는 구나‘ 하고 생각했고, ’게으르고 세상의 아픔에 무관심하게 산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사유에 의해 활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드리고 싶습니다.
일을 하면서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생명이 어떤 위험에 처해있는지, 우리가 자연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무심하게 진행하고 있는 일들이 어떤 과정과 결과로 돌아오는지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소비하면서 비대해지는 기업과 경제발전을 중요한 지향점으로 삼고 있는 자본주의의 측면에서 보면 환경과 생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대단히 큰 걸림돌이었고, 저는 개발이나 발전을 저해하는 암과 같은 존재로 지목되었습니다.
제가 ‘산이 울고 있다’고 하자 사람들은 저를 ‘만신’이라고 조롱했습니다. 천성산 생태계의 지표종인 도롱뇽을 원고로 소송하자 기업이 지원하고 있는 연구소들은 천성산 공사 터널 공사가 지연되면 연간 2조 5천억 원의 손실이 난다는 보고서들을 내놓았습니다. 국내 보수 언론 역시 ‘도롱뇽을 살리기 위해 수조원의 국고가 낭비되고 있다며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손실문제를 이야기하자 사람들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은 곧바로 은유를 버렸지만 아이들은 은유를 잘 이해하고 엽서를 써서 소송이 진행중인 법원에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제 운동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단식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천성산 공사 백지화는 취임하는 대통령의 공약사업이었고 도지사, 시장의 공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린다.’는 식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도 그것을 관행으로 받아들였지만 저는 그 관행을 수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는 제가 소중히 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저항했습니다. 단식, 3000배, 3보 1배, 국토순례, 거리 사진전, 어느 때는 공사 현장에서 공사장 사람들과 문자 그대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웠습니다.
일을 하면서 저는 제가 무엇을 피해서 살아왔는지, 세상과 어떻게 소통했는지 신앙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싸워야 하는 힘들이 무엇인지, 저를 지지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 눈에서 무엇이 담겨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국내주요 언론은 연일 기사와 사설을 통해 비난을 퍼부었고 안티카페가 5개나 생겼으며 제 기사에는 조직적인 댓글 팀이 동원되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비난보다 제가 지키려고 하는 것들을 잃게 되는 것을 더 상심했습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저를 이끌어 준 힘은 우정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뿐 만아니라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우정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제가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불가에서는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 형상이 있거나 형상이 없는 모든 것을 화엄이라고 합니다. 바람소리 물소리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 엄마가 아이를 부르는 소리 풍경소리 모두가 세상을 장엄하는 실상이며 이를 화엄이라고 합니다.
빛과 소리를 사랑하고 이해하면 말과 꿈이 맑아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순화된 언어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에게 저항 할 수 있는 수단이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도롱뇽과 함께 꿈꾸는 초록빛 세상에는 사랑, 평화 그리고 생명의 숨소리가 있다.’
‘도롱뇽에게는 하늘 마음이 있고, 희망의 지도가 있다.’ ‘초록의 공명’ 등 평범한 생각들을 거리에 앉아 수놓았습니다. 바느질은 제가 즐겨하던 일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수놓기에 동참해주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수녀님들께서도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때 거리에 앉아 함께 수놓던 인연이 오늘 이 자리까지 온 게기가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한국에서 불교와 가톨릭의 우정이 시작된 시점이라는 이야기도 드리고 싶습니다.

종교 간의 화합은 같은 지향점을 바라볼 때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향한 연민,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 가난과 빈곤으로 고통 받고 정치적으로 박해 받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만나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우정, 종교 간의 우정은 세상을 순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물론 그동안 노력에 비해서 얻은 것은 아주 적은 것들입니다. 어쩌면 세상은 더 악화되고 있고 가망이 없어 보일 때가 많습니다. 현대 사회는 새롭고 복잡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는 물론 저 우주너머 까지 지식을 더 해갑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그것은 단지 지식의 한조각일 뿐입니다. 무한한 공간, 무한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아침 이슬 같은 존재 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직접적인 행복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이상 빼앗지 않고 나누는 삶을 살게 될까요? 저는 질문자로서 그리고 좋은 답을 찾는 사람으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환경문제 외에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농업문제이며 자연의 순리에 적응하며 적게 가지고 만족 삶의 방식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댐으로 인해 수몰될 지역에서 텐트를 치고 살면서 사람들이 떠나고 폐허가 된 마을에 남아 농사를 지으시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큐로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호미를 놓지 않으셨던 할머니들의 삶은 교훈으로 가득했습니다.
<영상>
이제 할머니들은 그곳에 남아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그곳에 머물고 있으며 강과 그곳에 깃드는 모든 생명들이 존중 받을 수 있도록, 자연은 재화 이상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강의 숨결 느끼기’, ‘강의 땅을 강으로’, ‘댐보다 습지를!’ 이라는 구호 속에서 한 평사기 운동을 진행하고 4대강 기록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영주댐 철거 소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문명이 가는 아주 빠른 걸음 위에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그러나 제 모든 성의를 다해 일을 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방문자로 이 세상에 왔다는 것, 언젠가 이 땅을 떠나게 되는 날이 오면 세상의 빛과 조우했던 시간, 세상의 아픔에 함께 했던 우정의 손길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